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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릉

역사관광 > 역사유적지

소개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된 이 무덤은 일명 궁촌왕릉(宮村王陵)으로 불리고 있으며, 궁촌리 추천 고돌재(고돌치)의 동편에 위치한다. 삼척에서 남으로 약 16km 정도 가면 동막리를 지나 사래재라는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가면서 바다 쪽을 건너다보면 큰 소나무가 외로이 서 있고 그곳에 석축굽을 돌린 큰 무덤이 보이고 그 옆과 앞에 작은 무덤이 2기 보인다. 이 분묘들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그의 아들 왕석, 왕우 등 3부자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양왕 4년 7월에 이성계가 즉위하고 8월에 전왕을 폐하여 공양군으로 봉하고 강원도 원주로 보내어 감시하다가 다시 왕과 장자인 왕석과 차자인 왕우의 3부자를 간성으로 옮겼으나, 역시 불안하여 태조 3년(1394) 3월 14일에 그 3부자를 삼척군 근덕면 궁촌리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한달 뒤인 4월 17일에 그들을 모두 죽였다.

현재 궁촌 뒷재인 사랫재(살해재의 음전으로 추측)와 마리방(말을 기르던 곳)이란 지명, 그리고 궁촌이라는 마을명과 궁터라는 지명 등은 공양왕 및 그의 자식들과 깊이 관련된 지명으로 추측된다. 공양왕이 이곳에 귀양와서 죽어 묻혔던 것으로 전해지나, 그 후 경기도 고양군 식사리(속칭 언침) 대자산으로 이묘해 갔다고도 한다. 현재 그곳에는 공양왕릉과 왕비릉이 사적 제1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 3년(1421) 1월 13일에 공양왕의 왕녀(단양군 이성범의 처)가 임금에게 상소하여 아버지를 공양왕으로 어머니를 왕비로 추봉하고 공양왕릉을 정릉(定陵)으로 정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헌종 3년(1837) 정유년 가을에 삼척 부사 이규헌이 개축하였으며, 1977년 당시 삼척 군수와 근덕면장의 노력으로 묘소들이 개축·보수되어 새롭게 단장되었으며, 이 묘소의 제향은 근덕면 봉찬회에서 매년3월에 택일하여 봉제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은 1392년 7월 이성계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그해 8월 공양군으로 강등된 채 강원도 원주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간성으로 옮겨 집니다. 조선왕조 개국 1년 후인 1394년 3월 14일 공양왕은 왕세자 석(奭)과 둘째왕자 우(瑀)와 함께 삼척(궁촌리)으로 옮겨지고, 이 때 동래현령 김가행(金可行)과 동해안 염장관(소금생산 감독관) 박중질(朴仲質) 등과 함께 삼척 울진지역의 인사들이 공양왕 복위운동을 벌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공양왕을 추앙하는 고려의 유생들과 군사들이 각지에서 궁촌리로 모여 들었고, 그 세력은 점점 커졌으나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공양왕은 삼척으로 유배온지 한달 뒤인 4월 17일 두 아들과 함께 역모죄로 살해됩니다. 왕명을 받든 사형집행 파견관은 중추원부사 정남진(鄭南晉)과 형조의랑 함부림(咸傅霖)이었으며, 처형방법은 교살(絞殺) 즉 목을 졸라 죽였고, 처형장소는 근덕면 궁촌리 입구의 살해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형집행 후 시신을 어디에 묻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전하는 공양왕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리와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두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기념물 제71호인 삼척의 공양왕릉에는 왕자 왕석과 왕우 그리고 시녀의 무덤이 함께 있고, 사적 제191호인 고양시의 왕릉엔 왕비의 무덤이 같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것이 실묘일까요.

삼척 공양왕릉에 관한 고증자료는 1662년 삼척부사 허목이 편찬한 [척주지]의 문헌기록과 오랜 세월 민간에서 전승되어온 전설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근덕면 궁촌리는 고려 공양왕이 천궁하였기 때문에 궁촌이라 이름한다. 또 북방에 고들치가 있는데 이곳에 공양왕릉이 있으며, 지금도 마을사람들에게 공양왕릉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왕이 살 때에는 구리재가 있어 동문을 세우고, 사라치에 살문을 세웠다고 한다』

『가래, 오늘의 추천 즉 궁촌에 옛무덤이 있는데 왕릉이라고 하며, 오늘도 밭이랑 사이를 가리켜 궁터라고 한다. 부로들이 전하기를 고려 공양왕이 원주로 추방되고 후에 간성으로, 다시 삼척으로 옮겨 태조 3년에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 왕이 거쳐하던 곳이 백성들의 집과 같았고, 왕이 돌아감에 그 장례 또한 백성들과 같았다. 그 땅에 산지기 한 사람 있을 뿐이다』

이 후 1837년 가을에 삼척부사 이규헌이 새로이 봉토를 한 기록이 보이고, 1942년 근덕면장 김기덕이 개축했으며, 1977년 6월 면장 최문갑이 다시 봉축하고 매년 음력 4월 17일 제례를 올리고 있습니다.

또한 삼척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양왕 3부자가 살해된 곳이 궁촌 입구의 "사라치(沙羅峙)"인데 공양왕이 처형된 후 사라치는 "살해재(殺害峙)" "사랫재"라는 지명으로 바뀌었으며, 당시 공양왕의 추종자들이 모두 잡혀 고돌산(古突山) 골짜기에서 살해되었는데 앞 개울물이 한 달 동안이나 핏빛이었다 합니다. 그후에도 조선왕조에서는 이들 시신이 있는 일대에 자객을 매복시켜 시신을 거두려는 왕씨일족과 추종자들을 죽였다 하여 살해재로 불리게 되었으며,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 마을사람들에 의해 공양왕 3부자의 시신이 거두어 졌다 합니다. 마을사람들이 공양왕의 시신을 메고 매장하러 가다가 행상꾼들의 발이 붙어 그 자리에 매장한 것이 지금의 고돌치 왕릉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공양왕릉 앞에 집을 짓게 되면 그날 밤 태풍이 불어 반드시 무너지고 만다는 속신에 따라 지금까지도 공양왕릉 앞에는 집을 짓지 않고 있으며, "왕릉 곁에 암장하게 되면 시체가 어디론가 없어지고 만다" "음력 8월 초하루에 벌초를 하면 어부들이 큰 횡재가 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철도개설을 핑계로 왕릉 앞의 비석과 석물을 모두 연못에 넣고 산을 깎아 메우며 능 부근에서 멸치를 말렸는데 모두 피부병에 걸려 죽었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궁촌이라는 지명은 임금이 계신 마을이라는 데에서 유래했으며, 공양왕 3부자가 거주했던 곳은 노곡면 상마읍의 "궁터"이며, 원평마을과 인접한 초곡리의 매리방은 원래 [말이방]으로 공양왕이 궁촌에 와 있을 때 마방(馬房)을 설치하였던 곳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경기도 고양시의 공양왕릉에 관한 자료는 어떨까요. 조선왕조실록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태종대에 들어 왕조의 기반이 다져지자 고려의 역대 왕릉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태종16년 8월에 공양군을 공양왕으로 복위시킴과 동시에 왕릉에 제사를 지내게 합니다. 그러나 왕릉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종 19년에 경기도 안성군의 청룡사에 모시고 있던 공양왕의 초상화를 고양현의 묘 옆 암자로 옮겼다는 기록이 보이고, 중종 13년의 기록에는 공양왕릉이 고양군에 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러나 실제 공양왕의 시신이 매장했다는 사료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실묘일까요. 영월의 장릉도 유배왔던 단종의 무덤으로 지역주민의 손에 의해 무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해 온 세력은 언제나 집권층이었다는 것과 오히려 민간의 구비전승 속에서 역사적 진실이 잘 남아있는 사례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어느 왕릉이 실묘인지 짐작되리라 봅니다.

아울러 조선시대에 들어 처음으로 베풀어진 국행수륙제가 삼척의 삼화사에서 올려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륙재(水陸齋)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불교의식입니다.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오른지 3일만에 사헌부의 주청을 받아들여 고려왕조의 왕씨일족을 강화도와 거제도의 두 섬으로 유배시켰다가 태조3년(1394)왕씨일족을 바다에 던져 무참히 살해한 것이 마음에 걸려 수륙제를 거행합니다. 왕씨일족이 살해된 지역의 사찰인 강화의 관음굴, 거창의 견암사, 삼척의 삼화사에서 수륙재를 베풀어 이들을 천도하도록 하였습니다.(태조실록, 양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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